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아침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게 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의 이야기로 말씀을 열겠습니다.
서른두 살의 직장인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집을 떠났고, 취직을 하고 나서는 더 멀어졌습니다. 부모님이 전화를 하면 바쁘다며 나중에 하자고 끊었습니다.
그러다 몇 해가 지나 어느 명절, 아무 약속도 없이 본가 현관문을 열었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마당까지 달려 나와 그를 끌어안으시더랍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알았다고요. 자신이 떠나 있던 그 모든 시간 동안, 어머니는 단 하루도 대문을 닫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누가복음 15장의 말씀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떠난 자식과, 단 하루도 대문을 닫지 않으신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는 가장 깊은 그림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신다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릴 때 들려주신 세 비유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잃은 양, 잃은 동전, 그리고 잃은 아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얼마나 애타게 찾으시는지를 단계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이 한 말을 다시 보십시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이 말이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인 말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의 말은 사실상, "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이 필요합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에 죄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은 필요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갖겠다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품이 아니라 아버지의 지갑만 원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고, 하나님이 주신 건강과 시간과 재능은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떠남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먼 나라"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아버지의 눈이 닿지 않는 곳,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서른 무렵의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자유라고요. 그래서 신앙도 부모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그 아들에게 찾아온 것은 자유가 아니라 흉년이었고, 굶주림이었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주는 이가 없는 비참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오늘 우리 마음 한구석이 그 먼 나라에 가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에는 교회에 앉아 있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은 하나님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떠남은 거창한 가출이 아닙니다. 마음 한 자락이 아버지의 품에서 빠져나가는 것, 그것이 떠남의 시작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 이 한마디가 회개의 출발점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죄의 길로 가던 발걸음이 멈추고, 몸을 돌려 아버지를 향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을 진단합니다. "나는 여기서 굶주려 죽는구나." 자기 상태에 대한 정직함, 이것이 참된 회개의 첫걸음입니다.
그는 결심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보십시오. 그는 변명하지 않습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서요, 경제 사정이 어려워서요" 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자격이 아니라 품꾼의 자리라도 좋다며 자신을 낮춥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는 단지 후회가 아닙니다. 후회는 "아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후회는 과거를 바라보지만, 회개는 일어나 아버지를 향해 걷습니다.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은 사업이 무너진 뒤 몇 달을 술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새벽, 문득 정신이 들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한마디를 했을 때, 그 자리가 회복의 시작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바로 "스스로 돌이켜"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도 정직하게 돌이킵시다. 거창한 말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떠나 있었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회개는 우리가 완벽해진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첫발을 떼는 것입니다.
이제 이 비유의 절정에 도달했습니다. 20절입니다.
이 장면을 천천히 그려 보십시오.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먼저 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날마다 그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 하루도 대문을 닫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가라"고 했습니다. 당시 중동 문화에서 나이 많은 어른이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뛴다는 것은 체면을 완전히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모든 체면을 버리고 죄인 된 아들에게로 달려갑니다.
아들이 준비한 회개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명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죄지은 아들을 아무 대가 없이 받아 주실 수 있었을까요? 그냥 눈감아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내어 주십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받으시기 위해 내어 주신 것은 살진 송아지가 아니라 바로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이셨습니다.
탕자가 입은 제일 좋은 옷,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의 옷입니다. 탕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그 선언,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입니다.
우리가 아무 대가 없이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이유는, 그 대가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체면을 버리고 달려가신 그 사랑의 끝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겠는가" 하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우리의 자격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돌아오는 그 방향만 보셨습니다.
우리가 첫발을 떼면, 하나님께서 나머지 길을 달려오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 떠남은 죄가 무엇인지를, 돌이킴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맞아 주심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단 하루도
대문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한 가지 결단을 권합니다.
마음 한 자락이 먼 나라에 가 있던 그 부분을 오늘 정직하게 아버지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미루지 마십시오. 일어나 돌아가는 그 첫발을 오늘 떼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해 이미 달려오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그 따뜻한 품을 다시 누리십시오.
단 하루도 닫지 않으신 대문 · 먼저 달려오시는 아버지 · 일어나 돌아가는 한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