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여러분, 수요일 저녁 이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셨을 텐데 이 예배의 자리까지 나아오신 여러분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오늘 저녁, 우리는 다니엘 3장으로 나아갑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할지라도." 이 세 글자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응답이 보장될 때만 믿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세 청년에게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던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풀무불에 던져지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고난을 피하게 해 주세요. 이 시험을 없애 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식은 때로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다.
주목하십시오. "불 가운데를 피하게 해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을 통과하는 그 과정에서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고난 없는 세계로 데려가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풀무불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함께 계십니다.
지금 이 시간, 어떤 성도님은 취업 불합격 통보를 받은 지 여섯 달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아서 아프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진로를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 곁에 걷고 계십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진 것은 세 사람인데, 느부갓네살 왕이 불 속을 들여다보니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결박이 풀려 자유롭게 걷고 있었습니다.
그 넷째 분,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한 그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미리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많은 신학자들이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불 속에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풀무불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밖에서 구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 불 속으로 직접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의 불 속으로 직접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가 어떤 불 속에 있든 함께 걸으실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불 속에 함께 계십니다. 혼자라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넷째 분이 곁에 계십니다.
풀무불에서 나온 세 청년을 사람들이 살펴보았더니, 옷도 머리카락도 타지 않았습니다. 불탄 냄새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타버린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을 묶었던 결박입니다. 25절을 보면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풀무불 속에 들어갈 때 결박되어 있었는데, 그 불이 결박만 태워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풀무불 같은 고난의 시간 속으로 이끄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태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묶고 있던 결박을 태우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의 풀무불은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고난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것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붙들고 있던 두려움, 집착, 잘못된 의존을 태워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통과하고 있는 풀무불은
당신을 태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을 묶고 있던 결박을 태우고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그리할지라도"의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이번 주 가장 힘든 상황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저는 주님을 신뢰합니다."
풀무불 속에 넷째 분이 함께 계심을 신뢰하겠습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하루를 살아가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함께 계신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어떤 풀무불 속에서도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할지라도 · 넷째 분이 함께 · 결박을 태우는 불 속을 통과하는 한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