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아침 예배
2026년 9월 20일 주일

주께서 나를 살피사 아셨나이다

시편 139편 —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아신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피사 아셨나이다"
시편 139:1
☀️ 설교 듣기
바른믿음교회 주일 아침 예배 · 2026.09.20

사랑하는 바른믿음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지으신 새 주일 아침,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음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가. 나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보일까. 젊었을 때 품었던 꿈과 지금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느끼고, 자녀들은 어느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몸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하루하루 실감합니다.

그리고 마음 한켠에는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내가 감추고 싶은 실패와 부끄러운 기억들, 나의 약함들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는 것인가. 이 질문은 두렵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간절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나를 완전히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러면서도 나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두려운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오늘 시편 139편은 바로 그 자리,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아신다고.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아신다고.

1부. 살피사 아셨나이다 — 사랑의 앎

시편 139편은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의 삶은 영광만큼이나 깊은 상처와 실패로 가득했습니다. 간음과 살인이라는 무거운 죄의 짐, 충직한 신하를 전쟁터로 내몬 후회, 자신의 아들들 사이에서 일어난 반역. 그렇게 인생의 깊은 고비들을 넘어온 다윗이 이 시편에서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피사 아셨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시편 139:1–2

히브리어로 살피사에 해당하는 단어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귀한 보석을 감정하는 사람이 그 보석을 사방으로 돌려 가며 속속들이 들여다보듯, 철저하게 탐색하고 파악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셨나이다라는 단어 역시 단순한 지식적인 앎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계 안에서의 친밀한 앎, 깊이 알고 사랑하는 앎입니다.

앉고 일어섬이라는 표현은 우리 삶의 모든 일상을 가리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밤에 잠드는 그 순간까지,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새벽에 내 마음속을 스쳐가는 생각들까지,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아신다고 다윗은 노래합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을 때 어떤 분들에게는 두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내가 감추고 싶은 것들, 누구에게도 말 못한 것들까지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 고백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그 앎은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표정만 봐도 오늘 힘들었는지 아닌지를 압니다. 아내는 남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엇이 마음에 걸려 있는지를 압니다. 그 앎은 감시가 아닙니다. 수십 년의 동행 속에서 자라난 사랑의 앎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이 바로 그런 앎입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완전하며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앎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한복음 10:14

목자가 양을 아는 것은 통제하거나 감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끌고, 지키고, 먹이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의 두려움을 아시기에 우리 곁에 머물러 주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아시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2부.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 창세 전의 사랑

하나님의 이 완전하신 앎은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이 아닙니다. 시편 139편은 훨씬 더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편 139:13–14, 16

우리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 어머니의 태 안에서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보고 계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운명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 안에서의 선택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4

창세 전부터,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은혜 안에서, 그 택하심이 이루어진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몇 달 전, 젊은 부부가 아이방을 꾸미는 모습입니다.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아이를 위해 작은 침대를 놓고, 조그만 옷가지들을 정성스럽게 개어 두고, 벽에 예쁜 그림을 붙이면서 두 사람은 설레는 마음으로 이 작은 생명을 기다립니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가 될지 아직 모르지만, 이미 그 아이는 깊이 사랑받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신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먼저, 훨씬 더 깊이, 이미 사랑 안에서 우리를 알고 계셨습니다.

3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 위에 서다

지나온 날들이 후회스럽고, 앞으로 남은 날들은 어떻게 될지 걱정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감정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합니까. 바로 이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이 자리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태 안에서부터 지으시고, 이름을 아시며, 날마다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이며 내 삶의 기초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예레미야는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실 때, 그의 능력이 아니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앎과 사랑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내가 그분의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부족해도, 흔들려도, 지쳐도, 그분은 여전히 나를 아시고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직장을 잃고 몇 달을 기도하며 버티던 오십 대 중반의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기도 중에 고백한 것은 아주 짧은 한 마디였습니다.

"하나님,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시잖아요."

그 짧은 고백이 그분의 삶을 돌이켰습니다. 내가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 그 믿음 하나가 두려움을 이겨낸 겁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실 때, 이 한 마디를 마음에 담아 가시겠습니까.

"주님, 주께서 나를 아시나이다."

그 고백이 걱정될 때 나오게 하십시오. 외로울 때 나오게 하십시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나오게 하십시오. 그 고백 하나가 우리 삶을 주님 앞에 다시 세우는 첫걸음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앎이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친히 육신이 되셨고, 우리의 죄를 아시기에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죽음을 아시기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은혜 위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말씀 앞에 서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아신다는 그 진실이 오늘 우리 마음에 새롭게 새겨지게 하여 주옵소서.

지나온 날들을 후회하며 움츠러든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앞에 놓인 날들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주님의 손을 붙잡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주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그 한 가지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느리게 · 바르게 · 함께 · 아멘